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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뒤늦게 책이라는 것이 좋아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소설 위주의 독서였는 데 우연히 읽게 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 덕분에 시도 좋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시집도 사 모으면서 나름 시를 읽었는 데 직장 다니면서 이상하게 읽지 않았네요. 그러다 작년부터 다시 시를 읽으면서 조금씩 시적인 감성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시를 읽고 감상하는 것을 더 잘 즐기고 싶은 마음에 근처 교육관의 교양강좌인 문예창작반에 등록해서 수업도 듣고 있네요. 이제 3회 수업을 들었는 데 같이 수강하는 분들이 엄청 열정적이라 배우는 것이 참 많아 좋습니다. 매주 숙제로 시를 적어오라 하는 데 아직 숙제를 하나도 못하고 있어 민망하지만 좋습니다. 다들 취미로 시를 쓰는 분들인데 써온 시를 보면 참 재능 있는 분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 숙제를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부담이 살짝~~~

 

오늘 소개하는 시 3편은 문예창작반 선생님이신 시인 '권정남' 선생님이 소개해준 시들입니다. 세 편 모두 마음이 참 짠해집니다. 이번 주 주제가 '아버지'였기에 그에 관한 시를 소개해준 것입니다. 이 날 수강생 분도 '아버지'에 관해 써온 시를 낭독하는 데 그리움에 감정이 북받쳐 올라 울먹이신 분들이 몇 분 계시네요. 

 

5월 가정의 달 아버지에 관한 시 3편 감상

Pixabay 로부터 입수된  4144132 님의 이미지, 철길 걷는 아버지와 아이

 

해, 저 붉은 얼굴 /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 십만 원 읎겠니?”

그 말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 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뚝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 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닿고 있다.

 

 

Pixabay 로부터 입수된  Lorraine Cormier 님의 이미지, 숲 길의 아버지와 아이

 

아버지의 등 / 하청호

아버지의 등에서는

늘 땀 냄새가 났다

내가 아플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고

등에서는 땀 냄새만 났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인 것을

땀 냄새가 속울음인 것을.

 

Pixabay 로부터 입수된  sarahbernier3140 님의 이미지, 바닷가 아버지와 아이

 

터미널 / 이홍섭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 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 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서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다 아련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땐 그냥 근엄한 이미지로만 남았는 데 같이 나이 들면서 아버지가 더 늙어가는 모습은 가슴이 아파오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항상 어렵고 야속한 사람으로만 여겨졌었죠. 무뚝뚝한 표정에 친근한 말 한마디 없이 얼굴 보기 힘든 날이 많았으니 지금 40대 이상인 분들에게 어릴 적 아버지의 이미지는 다 비슷할 것 같네요. 근데 위 3편의 시들은 그런 아버지의 인생을 조금씩 알아가고 공감하며 늙으신 아버지에게 측은지심을 가지게 된 것을 표현한 시입니다. 

 

누군가 이런 글을 적었네요. '아버지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고. 처음엔 주어진 삶이었을 것입니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 아버지라는 책임감이 주어지죠. 한 가족의 가장이 되면서 가지게 된 의무감과 책임감 때문에 비우지 못한 집착에 외곽을 맴돌게 하고 상처가 생겨도 숨기며 살고 치료하지 않고, 챙기지 못해 온 소소한 주변의 행복을 깨닫기까지 아버지가 견뎌야 할 무게는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무거운 책임감에 한 인생을 잘 버텨오다 어느 순간 그 책임감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약해지는 것이 아버지들의 모습이죠. 그런 아버지들의 모습을 잘 표현한 시들입니다. 

 

읽어보면 가슴이 참 아련해집니다.

 

다가오는 어버이날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부모님들께 사랑의 말 한마디씩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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