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보리수가 깊은 신음 소리를 내고
달빛은 나뭇가지 사이로
내 방을 엿본다
나를 버린
그리운 사람에게
긴 편지를 썼다
달빛이 종이 위로 흐른다
글귀를 흐르는
고요한 달빛에
나는 슬픔에 젖어
잠도, 달도, 밤 기도도 모두 잊는다
많은 사람들이 가을이면 애수에 젖어듭니다. 점점 싸늘해지는 날씨와 붉게 물들어 가는 가을단풍 그리고 하나 둘 지는 낙엽들을 보다 보면 괜히 쎈치해진다고 하죠. 헤르만 헤세도 달빛 가득한 가을의 어느 날 밤 같은 기분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를 버린 그리운 사람에게' 긴 편지를 씁니다. 편지 쓰는 내내 달빛이 엿보고 있습니다. 외로운 밤하늘을 홀로 비추고 있는 달빛에 마음이 더 슬퍼집니다. 보리수의 깊은 신음 소리에 묻혀 시인의 아픈 신음 소리가 사라집니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죠.
가을만 되면 왠지 모를 우수에 젖는 남자들이 많습니다. 활력 넘쳤던 여름이 지나가고 이제 겨울이 오기 전 가을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한 해를 마무리할 때입니다. 일 년을 잘 보냈는 지 되돌아 보면 좋은 일, 나쁜 일들이 다 떠 오르겠죠. 근데 신기한 건 좋았던 일보다 안 좋았던 일들이 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을에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달래보다 보니 더 우수에 젖어 드는 건 아닐까요? 그러다 보면 나를 버린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다들 그런 추억들 하나 씩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근데 헤세는 저 편지를 과연 보냈을까요?
올 가을 정말 그리운 사람에게 긴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요? SNS가 아닌 손편지를 보내고 받아 보면 이 가을이 그나마 덜 외롭고 덜 슬퍼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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