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 살이 있었다
과거의 풍경들이 솟아올라 하나 둘 섬을 만든다. 드문드문 건져 올린 기억으로 가까운 모래밭을 두어 번 공격하다보면 어느새 날 저물어, 소문대로 갈매기는 철없이 어깨춤을 추었다. 지루한 飛行 끝에 젖은 자리가 마를 만하면 다시 일어나 하얀 거품 쏟으며 그는 떠났다. 기다릴 듯 그 밑에 몸져누운 이마여ㅡ 자고 나면 한 부대씩 구름 몰려오고 귀밑털에 걸린 마지막 파도소리는 꼭 폭탄 터지는 듯 크게 울렸다.
바다, 밀면서 밀리는 게 파도라고 배운 서른두 살이 있었다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는데 비가 내리고, 어디 누우나 비 오는 밤이면 커튼처럼 끌리는 비린내, 비릿한 한 움큼조차 쫒아내지 못한 세월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밤이 깊어가고 처벅처벅 해안선 따라 낯익은 이름들이 빠진다. 빨랫줄에 널린 오징어처럼 축 늘어진 치욕, 아무리 곱씹어도 이제는 고스란히 떠오르지도 못하는 세월인데, 산 오징어의 단추 같은 눈으로 횟집 수족관을 보면 아, 어느새 환하게 불 켜고 꼬리 흔들며 달려드는 죽음이여ㅡ 네가 내게 기울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로 기울어가리."
군대 제대하고 복학해서 뒤쳐진 공부를 따라가느라 무척 힘든 시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마음의 여유가 없이 밀린 공부 따라가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기,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 중 하나가 시(詩)였었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가 그 때 참 인기가 많았다. 20대 때 진로와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던 시기, 서른이 되면 과연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기대와 불안감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 시기에 시집의 제목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서른이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때라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가는 꽤 힘든 시기라고 막연히 짐작은 하고 또 그렇게 듣고 있었는 데 시집의 제목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니! 뭔가 본능적으로 이끌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나도 딱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이제 더 이상 20대의 풋풋한 젊음과 패기 그리고 순수함을 버리고 사회라는 거대한 울타리에서 하나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20대때까지의 철없던 잔치가 정말 끝나는 나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시인도 그런 기분이 들었기에 방황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혼자 그 당시에는 가기가 좀 힘들었던 속초로 여행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빨랫줄에 널린 오징어처럼 축 늘어진 치욕, 아무리 곱씹어도 이제는 고스란히 떠오르지도 못하는 세월인데"라고 썻을 것이다. 오징어를 보면서 축 늘어진 치욕을 느끼는 건 시인의 감성이겠지만 그때 느낀 감성은 사뭇 마음이 쓰라려 오는 아픔인 것이다.
"바다,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 살이 있었다", "바다, 밀면서 밀리는 게 파도라고 배운 서른두 살이 있었다"
25년의 세월만큼 파도는 더 세게 밀려 나가는 것이다. 일렁거림의 작은 파도만 알고 있던 나이에서 밀리고 또 밀리며 멀어지는 물결이 그렇게 세월 속에서 감정이 밀려나간 것은 아닐까? 순수했던 감정과 추억들이.
"네가 내게 기울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로 기울어가리." 이 싯구 아래엔 이렇게 적어 놓았었다. "전혜린씨가 생각난다"라고. 전설이나 신화 속으로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있는 데 그 중 한 사람이라고 누군가 평했던 격정적으로 삶을 살았던 분이 생각이 났었나 보다.
저 시의 영향이었을까? 서울에서 30년 살다 속초로 이사와 살게 된 것이. 저 시집을 읽기 전에 속초는 설악산 등반으로 하루 머물렀던 것이 다였는 데. 시에선 시인의 감정이 어둡고 슬프고 또 치욕적인 부분이 커서 시 전반적으로 우울하게 묘사되었지만 속초는 산, 바다 그리고 호수로 둘러싸인 멋진 도시다. 가을바다, 갈매기 그리고 파도를 감상하면서 우울한 기분을 씻어 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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