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거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1930년, <조선지광>에 수록
거의 100년 전에 발표된 시인데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시입니다.
겨울 날 유리창에 입김을 불 때 투명한 유리창에 하얀 입김이 서리는 모양에 왠지 모를 아픔과 슬픔이 깊게 묻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얀 입김에 서리 창 밖의 길들이 마치 새들의 날개를 입은 모습처럼 보였나 봅니다. 입김서릴 때마다 그 입김의 모양새가 날개 파닥거리는 모습으로 보인거죠. 이런 표현을 볼 때마다 감탄합니다. 시인의 시적인 순간은 일반인이 느낄 수 없는 순간입니다.
입김을 불고 또 불어 하얀 서림이 물방울로 뭉쳐지고 그 물망울에 별이 반짝 투영되어 박힌 모습도 대단한 시선입니다.
밤새 유리창을 닦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 보기 위한 행동이겠죠.
추운 겨울에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겠죠.
마지막 행은 아무래도 그 누군가가 결국 오지 않은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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