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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毒)을 차고
 
            - 김영랑(1903∼1950)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이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훑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얼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시집』(범우)에 실린 시인 연보를 훑어보다가 ‘1926년 장녀 애로(愛露) 출생’에서 입 끝이 빙긋 올라갔다.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딸 이름을 정성껏 짓는다면, 요조하고 현숙한 여인을 기원하는 마음이나 인생의 심원한 뜻을 담던 시절에 ‘애로(사랑의 이슬)’라니! 세상 눈치 보지 않는 자유로운 의식, 그리고 사랑과 아름다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찬란한 감각이 엿보인다.

   선생의 시는 ‘서구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전통적인 시형을 현대시 속에 끌어들여 전통적인 것과 현대 서구적인 것의 접목 작업에 성공하고 있다. 특히 호남지방의 토착적인 언어를 탄력적으로 구사하여 언어예술로서 시의 참맛을 살려나간다’(평론가 김우종). 쉽고 친근한 시어로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선생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내 마음을 아실 이」 「오― 매 단풍 들것네」「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에 공감하고 애송하는 독자가 많을 테다.

   「독을 차고」는 선생이 나긋나긋한 감성의 ‘초식남’이기만 한 게 아니라 강건한 뼈와 근육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짧은 인생 그냥저냥 살고지고, 하는 친구에게 설핏 경멸의 독기를 뿜으며 끝내 독을 차고 가련다는 이 기개! 의당한 독을 버리고서야 어찌 사람이겠는가. 이 슬픔의 독, 분노의 독을 차고 가리라! 이 시는 식민지 시대 말기의 반항의식을 나타낸다고 한다. 선생이 6·25전쟁을 무사히 넘기셨으면 이후 어떤 시를 쓰셨을까….
 
  - 황인숙 (시인)

 

양양 남대천 공원의 벤치

독을 차고 - 김영랑, 허무한듸! 한 마디 외침의 긴장감

양양 남대천 게이트 볼 공원(?)의 오전은 한가했다. 

몇몇 어르신들이 한가로이 오전의 망중한을 즐기는 공원 여기저기 사진을 찍다 위 시와 어울리는 사진 한 장을 건졌다. 

 

어른의 몸통의 몇 배는 되보임 직한 굵은 나무 뒤로 벤치 하나가 쓸쓸해 보였다. 

위 시 '독을 차고'를 이런 벤치에 앉아 있으면 그 감성이 더한층 마음에 와 닿을 것 같다.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거의 백 년 전 시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다 비슷한 듯하다. 

특히, 예술가나 시인의 감성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몇 배는 풍부하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들을 느끼고 보고 기록하는 것이다. 

 

100년 전인 데 전혀 낡거나 유치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를 우리도 현실에서 자주 마주치고 있는 건 아닐까? 사회생활하면서 겪는 숱한 사건들 속에서 내 마음은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어져 쓰라린 상처가 가득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날들 속에 마음에 남는 것은 '허무한듸!' 한 마디의 외침이 아닐까?

 

현대인들은 점점 더 정신이 피폐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김영랑 시인의 '독을 차고'가 더 마음에 와 닿는 것 같다. 더 정신이 피폐해지기 전에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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