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 함민복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 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에서 자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자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자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 이레. 2003
시의 앞부분 리어카에 이삿짐을 싣고 이사하는 모습은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참 많이 보이던 장면이었죠. 그 당시에는 그렇게 이삿짐들이 많지 않았고 이사도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리어카로 몇 번 나르면 이사가 끝났었던 시절입니다. 그런 날들이 얼마 안 된 것 같은 데 벌써 30여 년의 시간이 후딱 흘러버렸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과거의 추억을 살짝 떠올려 봅니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들었을 때였어도 튼튼한 미래를 위해 밤낮 없이 애썼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서울 외곽에 살았었는 데 아직 개발이 안된 지역이 많아 베니어판으로 허름하게 지어진 집에서도 살곤 했지요. 그런 와중에도 자식 하나 공부 시키기 위해 부모들은 온갖 고생들을 다 하셨던 시절입니다.
이삿짐 나르는 날은 당연히 자장면을 먹는 날이었던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네요. 제대로 장판도 깔려있지 않은 허름한 방 가운데에 신문지 하나 대충깔고 빙 둘러 앉아 자장면을 먹었습니다. 새로 이사온 집에서 앞으로의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 하기도 했었을 것입니다.
참 고마운 시입니다.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생각해보면 참 고단하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는 데 지나고 나니 그것도 다 추억이 됩니다. 이 시를 읽는 중년들은 저와 비슷한 감정과 향수를 느끼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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